23. 민수기- 광야생활1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40년 중 36년 이상을 기록한 책입니다. 1장과 26장의 인구조사로 인해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70인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민수기'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1. 인구조사 출애굽기는 고센에서 시내산까지, 레위기는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 이야기, 민수기는 시내산에서 모압 평지까지, 신명기는 모압 평지에서 기록 되었습니다. 민수기는 광야와 같은  생활을 하는 성도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이동 경로로 많은 장소들을 말하고 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민수기의 광야와 신명기가 알려주는 광야의 장소가 서로 다르게 표현된 곳도 많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장은 시내산에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정의 수를 지파별로 기록하고, 26장에서는 광야 생활을 마친 후 모압 평지에서 2세대들의 인구를 조사한 것입니다. 모압 평지에서의 인구 조사는 1차 조사를 하고 광야를 거치는 동안 애굽에서 나온 20세 이상의 장정은 모두 죽고 그들의 후손들을 계수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민 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 대로 계수 할 지니 민 1:3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민 1:46 계수 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 명이었더라 민 26:2 이스라엘 자손이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전쟁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 민 26:51 이스라엘 자손이 계수 된 자가 육십만 천 칠백 삼십 명이었더라 지파별로 보면 요셉 지파와 아셀 지파는 인구가 많이 늘었고 시므온 지파는 시내산에서 계수 할 때는 유다와 단 지파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졌었으나 광야를 지나면서 음란과 우...

프톨레미 왕조 vs 셀류쿠스 왕조 2

 셀류쿠스 니카터는  프톨레마오스와 같이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들 디아도코이 즉 후계자들 중에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책에 의하면 셀류쿠스는 프톨레마오스의 휘하 장군이었다고도 전하여 집니다.




1. 셀류쿠스 왕조

셀류쿠스는 BC 321년에 바벨론의 방백으로 임명됩니다. 그 후 BC 316년에 디아도코이들의 분열로 프리기아의 통치 자인 안티고누스에 의해 잠시 축 출 되는 수모를 겪게 되지요. 그러나 BC 301년 잇수스 전투 후에 다시 수리아와 소아시아을 지배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셀류쿠스 왕조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셀류쿠스 왕조는 총 30명의 왕이 다스리게 되는데 헬레스폰트와 지중해 연안에서 동쪽으로 인더스 강에 이르는 알렉산더 제국의 넓은 영토를 모두 장악해 디아도코이의 세 왕조 중 제일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셀류쿠스 왕조는 너무 도 강하게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므로 피지배계층의 문화를 탄압하여 속국들로부터 원성과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셀류쿠스 왕조의 6대 왕인 안티오쿠스 3세(BC 223-187)가 등극합니다. 그동안 이집트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아오던 유대 나라는 BC 198년 파네아스 전투를 통해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에서 수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통치로 바뀌게 됩니다.

2. 안티오쿠스 3세의 유대점령

안티오쿠스 3세의 유대 원정은 남방 왕 프톨레미 4세의 반격으로 라피아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라피아 전투는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처럼 프톨레미 4세의 아프리카 코끼리와 안티오쿠스 3세의 인도 코끼리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의 결과는 프톨레미 4세의 승리로 끝나지만 코끼리들의 대결에서는 안티오쿠스 3세의 인도 코끼리가 우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안티오쿠스는 코끼리를 얻었고 프톨레미는 승리했다'라고요. 후에 안티오쿠스 3세의 군대는 파니움 전투에서 이집트의 스코파스 군대를 격파하고 BC 198년에 다니엘서 11:16절에 영화로운 땅으로 표현된 유대를 점령합니다.
안티오쿠스 3세의 초기 통치 시에는 유대 나라의 백성들이 그들의 관습대로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세금도 3분의 1로 감면되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끌려와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의 자손들도 모두 해방시켜주고 그들의 재산도 돌려 주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대한 경건함도 있었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의하면 "모든 외국인들은 유대인들의 성전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법임을 명심하라. 또한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동물이나 고기를 들이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필요한 동물들만 들어오게 하라. 이것을 위반하는 자는 3,000드라크마를 제사장에게 벌금으로 바쳐야 한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3. 남방 왕과 북방 왕의 정략결혼

안티오쿠스 3세는 이집트와 화친하기 위해 그의 딸 클레오파트라를 BC 195년에 이집트의 프톨레미 5세와 정략결혼을 하게 합니다. 안티오쿠스는 딸을 이용해 이집트를 패망케 하려 했는데 정작 클레오파트라는 남편 프톨레미 5세와 합의하여 로마와 동맹을 맺어 버립니다.
단 11:17 그가 결심하고 전국의 힘을 다하여 이르렀다가 그와 화친 할 것이요 또 여자의 딸을 그에게 주어 그의 나라를 망하게 하려 할 것이나 이루지 못하리니 그에게 무익하리라

안티오쿠스 3세 시대에 셀류쿠스 왕조는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는데요. 문화적인 번영도 가장 화려하였습니다. 또한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포에니 전쟁의 영웅 한니발이 자신의 나라에 망명해 와 있었기에 이래저래 마음이 많이 교만해졌다고 전합니다. 
이런 교만과 자신감으로 뭉쳐진 안티오쿠스 3세는 겁 없이 로마와 전쟁을 벌입니다. BC 190년 이집트를 도우러 온 한 장군(단 11:18) 바로 루키우스 스키피오를 만나게 됩니다. 
단 11:18 그 후에 그가 그의 얼굴을 바닷가로 돌려 많이 점령할 것이나 한 장군이 나타나 그의 정복을 그치게 하고 그 수치를 그에게로 돌릴 것이므로
단 11:19 그가 드디어 그 얼굴을 돌려 자기 땅 산성들로 향할 것이나 거쳐 넘어지고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리라
로마와 두 번의 전투에서 모두 패배하므로 엄청난 배상금을 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면서 그가 유대 나라에 대한 관용의 정책도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그는 전쟁 배상금을 채우려 유대 나라 안의 모든 신전의 재산과 특히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까지 압류 하는 사태가 일어나 유대인들의 반감과 또한 마찰을 빚게 되지요.

4. 결과

이 때부터 유대는 셀류쿠스 왕조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안티오쿠스 3세는 암살을 당하게 되지요. 그 뒤로 셀류쿠스 4세도 별 힘을 쓰지 못하고 혼란 가운데서 암살을 당하고 그리고 이제 유대인들에게 최대의 위기를 가져다 주는 안티오쿠스 4세가 등극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 큰 페르시아도 알렉산더의 제국도 앞으로 등장하게 될 로마도 지금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오로지 예수님 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등바등 살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사는 우리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안티오쿠스 4세를 다니엘서 11장의 내용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